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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仙家 (郎家사상) - 단재 신채호


 

우리나라의 仙家 사상의 뿌리에 관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을 기사화한 것이 있기에 올려봅니다. 아래의 글에서 자세히 알 수 있듯이, 우리의 仙사상은 중국의 道家와는 다르며 우리 민족 고유의 정통 심신수양법이며, 철학이랍니다.

雲剛

 



마지막 고구려인은 누구일까....?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668년 멸망한 고구려의 잃어버린 옛 영토를 찾기 위한 시도가 수차례 있었다.

민족사관을 확립한 그는 고구려의 활동 무대였던 만주를 우리 민족 구성요소 안에 포함시킨 국토관을 갖고 발해를 재발견하는 역사관을 제시한다.

발해는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유민을 규합해 만주 동부지방 길림성 돈화현 부근의 동모산 기슭에 건국해 230년간 존재했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과 성산자산성이 바로 그 유적지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 주족(主族)의 개념을 설정, 단군→부여→고구려를 아(我)로 보고 신라보다는 고구려를 중시,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편입하고 단군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국가로 중시했다.

1908년 발표한 <독사신론>에서 그는 고대사의 정통을 단군에서 기자(箕子) 위만(衛滿)으로, 혹은 기자 삼한(三韓)으로 계승시키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 고구려로 계승 체계를 전환,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했다.

1924년을 전후해 완성한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역사관을 정립한 그는 언어, 인종(혈연공동체), 국토(토지) 등을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에 따라 그는 부여족이 단군족을 계승하면서 뒷날 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했다.

종래 사학계에서는 단군을 정통으로 단군→기자→위만(삼한은 부속) 사군이부→삼국→통일신라로 계승하거나 혹은 단군→기자→삼한(혹은 마한)→삼국→통일신라로 계승된다는 두 계통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흐름을 모두 거부하고 단군의 정통이 부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새로운 역사 체계를 제시했다. 따라서 <삼국사기> 이래 신라 중심으로 짜여 있던 한국사의 체계가 그에게서 부정되었고 거기에 따른 파장으로 발해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다.

그는 또 고려시대 묘청의 ‘칭제북벌론’을 삼국 통일 이후 처음으로 중국에 대해 근본적인 반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높이 평가한다.

1925년 발표한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글에서 그는 묘청이 일으킨 서경 천도 운동의 이면에는 낭·불·유(郎佛儒) 3가의 쟁투가 감추어져 있었다고 보았다. 이 싸움은 곧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다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낭·불 양가는 패퇴하고, 유가가 집권해 민족의 진취적인 기상이 소멸되었다고 보았으며,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를 그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신라의 국선(國仙)이 고구려의 선인(先人→仙人)과 통한다고 생각하고, 화랑은 본래 상고 시대 소도 제단(蘇塗祭壇)의 무사로서 당시에 ‘선비’라고 일컬어지던 자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仙)을 도교의 선(仙)으로 오인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전통적인 선 사상을 낭가 사상(郎家思想)이라 함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낭가 사상은 고려 시기까지 면면히 이어지다가 윤언이와 묘청, 정지상 등이 주장한 ‘칭제북벌론’의 사상적 기반이 됐다. 하지만, 묘청이 중국의 사상에 휩쓸린 김부식 무리에 의해 타도되니,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위치를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낭가의 독립 사상이 설 자리를 잃고 사대주의가 판을 치게 되었으니, 이 사건을‘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할 만하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는 특히 고구려의 읽어버린 우리의 옛땅, 만주를 회복하려했던 고려 최영 장군을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우리의 민족의식을 높인 3대 영웅으로 꼽고 민족혼을 일깨운다. 호도 최영의 단심가(丹心歌)에서 따왔다.

최영은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때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치고 1388년 요동 정벌을 계획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좌절된 후 1388년(우왕 14) 참형됐다.

위화도회군은 우왕 때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으로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자, 최영이 중심이 돼 명의 대(對)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을 제기하면서 비롯됐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회군해 권력을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했다.

위와 같이 1세기 전 그가 역사 속에서 찾으려 했던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땅과 고구려인의 높은 기상이 최근 중국의 ‘동북연구공정’에 의한 고구려사 왜곡으로 다시 빼앗길 위기에 처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가 바로 투철한 민족주의 사가이자, 불굴의 독립운동가요, 한국근대사에 고봉을 이루는 언론인이었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이다. 단재가 이같은 사실을 무덤 속에서 안다면 뭐라고 분노할까?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고대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고 지켜야겠다.


신충우 기자는 단재사관연구소장입니다.

2004/08/31 오전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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