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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한국인의 정신건강 : 국선도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제 글이 아니고, 퍼온 글입니다.

 

Source: http://cafe.daum.net/danyol (임경택교수의 단침과 열기 카페),

글쓴이: 길..[김내균, 중앙대 철학과 교수] 

 

한국인의 정신건강 : 국선도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1. 왜 감정이 문제인가?

 

마음의 병은 정서적인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환희와 분노, 사랑과 미움 등의 개념들은 모두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이러한 감정들의 뒤얽힘 속에서 웃고 울며, 우울한 상태에 빠지기도 하고, 행복에 겨워 눈물 흘리기도 하며, 분노에 치를 떨기도 한다. 어떤 때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울다가도 영문 모를 미소를 짓기도 한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변화무상한 정서 변화가 매일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하루에도 삼천 번의 감정 변화가 일어난다.”(日日三千心)고 하지 않았던가?

 

감정의 첫 번째 특성은 그것이 수동적(passive)이라는 데 있다. 감정이란 외부로부터의 어떤 자극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와 닿게 될 때에 갖게 되는 느낌을 말한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전후관계를 파악하여 판단을 내리는 적극적(active)인 특성을 지닌 이성과는 다르다. 따라서 감정은 당하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에 대해 반응을 한다는 의미에서 당하는 것이다. 영어의 감정과 열정을 뜻하는 passion이라는 개념은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그리스 어원(παθαίν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의 “수난절 주간”을 “Passion Week”라고 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감정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인가에 따라 한 사람의 마음 상태를 한껏 고양시켜주기도 하고,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자아의 강도”(ego strength)가 센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된다. 문제가 되는 대상은 아무런 대책이 없는 어린 아이들과 허약한 사람들이다.

 

감정의 두 번째 특징은 강한 충격과 자극을 외부로부터 받게 되면 몸과 마음이 동시에 경직된다는 점이다. 그 결과 충격의 강도와 상태에 따라 감정의 응어리가 만들어 진다. 이러한 응어리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는 강한 정신적 충격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만들어진 응어리이다. 그 외에도, 어떤 인물에 대한 증오심이나 질투와, 시기심, 복수심, 집착과 애착심이 생기게 되었을 때와 같이 능동적으로 자기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응어리들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가슴 깊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나 같은 응어리지만, 후자는 전자보다 풀기가 훨씬 용이하다. 자신의 의지가 개입이 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당해서 만들어진 경우와는 다르다. 엄마 품에 안겨있는 아이는 몸과 마음이 경직되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부모가 건강한 경우에는 아이도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구한 날 야단만 맞는다든가 매를 맞고 공포 속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아이는 긴장 속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몸과 마음이 경직이 된다. 자폐증(自閉症)이 그 한 예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폐쇄시켜 버리는 현상이다. 이 후자의 경우는 마치 산모가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때에 뱃속에 들어 있는 태아가 돌덩어리처럼 굳어지는 것과 같이, 마음에 큰 상처가 되어 남게 된다. 어린 아이로 내려 갈수록 받는 상처와 충격은 강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 받은 아이는 그 사건에서 벗어나게 되나, 사실은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상처(trauma)를 하나 둘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상처는 감정의 상처이다. 그 충격에 따라, 그 때 받은 정서적 상처가 한 사람의 삶을 평생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 평소에는 상처받은 감정의 실체(핵심감정)가 무엇인지를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러나 후일 이와 유사한 자극을 받게 될 때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감정적으로 큰 동요를 하게 되며, 때로는 심한 정신장애 현상을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장애 현상은 때로 한 개인적인 문제인 경우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대물림을 받고 주는 예가 허다하다. 딸을 알려면 그 어머니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혼사를 앞두고 상대의 집안과 부모가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해 부모들이 관심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무엇이 극복(克服)과 정화(淨化)의 대상인가?

 

조상으로부터 무엇을 대물림 받았는가를 아는 일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고, 건강한 국민성을 회복하기 위한 정화(Catharsis)와 극복의 대상이 된다. 일흔이 넘는 우리의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가 힘겹게 살아 온 분들이다. 어디 그분들뿐이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가 말 그대로 고난과 수난의 역경 그 자체이었을 것이다. 거대한 나라 중국과, 시도 때도 없이 침략과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 사이에서 얼마나 숱한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민족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조상들은 나라를 지키며 지금까지 생존해 왔다. 지금까지 나라를 잃지 않고 반만년 동안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손바닥만한 나라가 강대국에 합병되어 소멸되지 않고 견뎌 낸 것이다. 이렇게 생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굴욕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왔겠는가? 우리는 비록 조상들의 불굴의 정신, 그리고 작지만 더없이 소중한 문화유산을 이어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생존 과정에서 그들이 겪은 숱한 고통과 울분, 한 맺힌 서러움을 또한 물려받게 되었다. 이 부정적인 유산은 우리 민족 모두가 극복해야 할 당면의 과제로 우리들 가슴속에 지금도 남아 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빨리 끓고 쉽게 식는 냄비와 같은 민족이라고 말을 하는 것일까? 왜 쉽게 자존심을 상해하고, 말 한마디, 호칭 하나에 예민한 감정 변화를 나타내는 것일까?

 

나는 우리말이 화폐처럼 자꾸 인플레 돼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무한테나 선생님, 사모님, 사장님, 회장님이다. 새파랗게 젊은 검사, 판사에게도 영감이라는 호칭을 부른 때가 있었다. 존칭, 극존칭과 높임말이 많은 나라, 왜 우리는 이러한 존칭과 호칭에 민감한 것일까? 상대방의 눈치와 기분을 살펴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 있는 사람의 기분을 맞춰 주어야 한다는 의식의 대물림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이유야 어떻든 자신감의 결여로부터 나온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자신감이 없으면 쉽게 초조하고 하찮은 일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면모를 보인다.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불안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은 편안한 삶을 살아오지 못한 우리 선조들의 대물림에 의한 부분이 많다. 가깝게는 일제 36년의 식민지 지배와 동족상잔의 6.25를 거치면서 할아버지 세대들의 극단적인 공포와 불안, 냉대와 박해로 인한 서러움, 억울하게 세상을 하직하던 피맺힌 원한이 아직도 정화되지 못한 채 우리들 핏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들은 극도로 열악한 생존환경 속에서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정서불안으로부터 야기되는 또 다른 내부적 혼란, 갈등을 겪으며 살아왔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겪은 처참한 고통과 비애, 수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맺힘과 분노는 당해보지 않은 사람 말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들 것이다. 우리 조상들 모두가 힘든 과정을 겪으며 살아왔지만, 특히 과거 할머니 어머니들은 이러한 외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고, 할아버지나 아버지, 남편으로부터 또한 많은 정신적 박해와 억압을 받으며 살아왔다. 남자들의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아내와 자식들에게 전가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다른 나라에는 없는 "화병(火病)"이라는 정신적 질환을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지니고 살아 왔다. 이들이 지닌 그 수많은 정신적 억압이 그 후손들인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게 대물림 되고 있는 것이다. 서방 선진국들에 비해 우리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서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이러한 대물림과 무관하지는 않다.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에 위암 환자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감기만 걸려도 불안하여 주사를 맞고 항생제를 남용하는, 항생제 복용 세계 제 1 위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불안과 초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닌가? 동남아 국가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들 보다 비정상적으로 기독교가 보급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며, 신도들 가운데 남자들 보다 여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보다 가슴에 상처를 입는 쪽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자에 비해 월등히 감성적이라는 이유에서 그렇다. 이제 모두가 유념해야 할 일은 자식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더라도, 맺힌 한을 더 이상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불안이 더 이상 아이들에게 전이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과감하게 우리 세대에서 끊어야 한다. 이 시대의 많은 분들은 아이들 문제에서부터 부부간, 고부간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숱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경험하며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숱한 어려움 가운데에는 덧 뺄셈처럼 간명하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데에 그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가슴속에 맺힌 감정의 응어리는 그렇게 쉽게 풀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심각성은 그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강대국과 약소국가 사이의 긴장과 대결, 종교간, 문명간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갈등의 골이 심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첨단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잘못된 자연에 대한 관계정립으로 인하여,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을 야기 시켰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유전자 조작을 가능케 하였으며, 그 부작용을 예측하기도, 제어하기도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위기 상황은 역사적으로 그 어느 시대에도 처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위기는 그 뿐이 아니다.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IT 산업과 디지털 문화의 실체를 보라. 인간의 정신세계를 극단적으로 양분시켜 놓고 있지 않는가. 오늘날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사이를 오가며 이중적인 삶, 이원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여파로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던 다양한 정신장애와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매일매일 늘어만 가고 있다. 인간의 삶의 리듬은 자연과 더불어 살 때에 가장 편안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삶의 리듬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빠른 템포에 적응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생체리듬과 IT, 디지털 문화 리듬이 엇박자 되어 현대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살고 있다. 이래저래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3. 건강회복의 세 가지 길

 

그렇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있는 것일까? 현대인라면 누구나 원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 그것은

 

가) 잠 잘 자고, 밥 잘 먹고 소화 잘 시키며, 변 잘 보는 일,

나)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최소화시키는 일,

다) 쾌적한 주거 환경을 만들어 자연 친화적인 환경 속에서 쾌적하게 생활 하는 일,

라) 그리고 모든 심리적인 불안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좋은 환경 속에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삶의 활력을 되찾는 일이다.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만드는 일은 모든 국가들이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이고,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어느 정도는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문화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문화적 삶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부작용을 최소화시키는 방법을 찾는 길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의 길은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로 제한이 된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건강유지를 위하여 스스로 수양을 하고 꾸준히 운동과 섭생을 해 나가는 일이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 각자의 건강 상태에 따라서 상담이나 심리치료 그리고 정신치료적인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종교적 신앙생활 또는 수도(마음공부)생활을 들 수 있겠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한 두 마디로 일반화시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 중 한 가지 대안으로 나는 국선도 단전호흡만을 국한시켜 생각해 보고 싶다.

 

인간사 모든 문제가 “마음 쓰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문제는 마음 관리, 즉 자기관리의 문제로 요약된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그 관리를 잘 하지 않으면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상담과 정신치료적 접근 방법은 개인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시작한다. 과거의 상처와 망령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식 선생의 지적처럼, 그것은 저마다 지니고 있는 자신의 핵심감정, 대혜선사가 말한 “마음에 거리끼는 것”(碍膺之物)을 파악하여 그것을 녹이는 일이다. 정신치료는 정신을 대상으로 상담과 분석치료를 해 나간다. 치료자와 내담자의 인격적 신뢰관계 속에서 치료가 행하여진다. 물론 심한 경우에는 약물의 힘을 빌어서 치료를 병행해 나간다. 이 작업은 상담자나 치료자, 그리고 내담자 모두의 인내를 필요로 하는 힘들고 고된 과정을 밟게 된다. 개인차가 있겠으나, 많은 심리적 정신적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경계선 환자나, 정신분열증 환자 등의 경우는 좀처럼 그 치유가 쉽지 않다. 그래서 현상유지가 최선의 경우가 많다. 상담과 정신치료가 이렇듯 치료자, 상담자라는 외부의 힘을 빌어서 내담자 마음의 상처(핵심감정)를 발견하고 굳어진 감정의 덩어리를 녹이는 일이라면, 국선도의 경우는 접근법이 이와는 다르다.

 

4. 국선도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국선도는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를 이원적 또는 이중적 구조로 보지를 않는다. 몸과 마음은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그것은 氣의 기능과 역할에 달려 있을 뿐이다. 따라서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몸은 위축이 되며, 몸이 위축되면 호흡에 문제가 생긴다. 호흡이란 "자신의 마음(息: 自+心)" 뜻하는 것으로, 호흡의 상태는 실시간 자신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국선도 수련의 핵심은 그러므로 단전호흡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호흡이 깊고 부드러우면 몸과 정신, 마음 모두가 최적의 기본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몸이 유연해지고 정신과 마음 또한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심신이 건강하게 되면 기분(氣分)이 좋고 생기(生氣)가 나게 된다. 氣의 분배가 잘 되고, 生氣가 나는 것은 정기신(精氣神) 삼단전(三丹田)이 제 기능을 효과적으로 발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국선도는 氣一元論의 철학적 입장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소우주로서 우주 자연이 생성되고 운용되고 있는 동일한 이치와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있다. 인간의 건강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몫(命)을 받아들여,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갈 때에 그 생명력을 강화시키며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우주 만물은 氣의 응축과 이완, 그리고 氣의 청탁에 의해 음양이 조응하여 변화가 일어나고 이로부터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氣의 세 가지 변용인 精氣神 세 원리와 이에 상응하는 삼단전의 구조와 기능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심신의 건강은 전적으로 정기신 삼단전의 정상적인 기능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이해는 국선도가 건강회복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精氣神이란 천지간의 유일한 실체인 氣로부터 나온 음양의 조화에 의해 각각 만들어지는 것이며, 분리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이합집산의 用을 말한다. 그러므로 氣는 인간의 몸속에서 정(精)이 되었다가 기(氣)가 되어지고 기(氣)가 되었다가 신(神)이 되어진다.

 

이 셋은 마땅히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神은 氣로, 기는 精으로 바뀌어 지며, 그 역으로도 가능하다. 즉 精이 氣로 화하고 氣가 神으로 화한다. 이는 물이 고체로 되면 얼음이 되고, 끓이면 수증기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기신을 촛불에 비유하자면, 精은 초가 되겠고, 氣는 불꽃이며, 神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기신을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精이란, 우리 몸을 움직이는 힘의 원천, 생명력을 양생하는 그릇, 화로와 같은 것으로서 하복부(하단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精이 약하면 생명력이 약하여 매사에 의욕이 없고 만병에 노출되어 있다. 반면에 精이 충만하면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게 되어 불굴의 의지와 의욕을 갖게 되며,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한 마디로 精의 기능은 하복부에 자리 잡은 하단전에서 밖으로부터 천기(天氣 : 호흡을 통해 얻는 氣)와 지기(地氣 : 음식을 통해 얻는 氣)를 받아들여 불을 지펴 힘을 만들고, 그 에너지化 된 氣를 온 몸에 제공하는 역할이다. 국선도 단전호흡은 精이 만들어지는 하단전 호흡을 통하여 단열을 만들어 하복부의 찬 기운을 몰아내고, 그 기운으로 중단전과 상단전을 보하여 심신의 안정과 건강을 회복하는 수련법이다. 하단전은 이와 같이 단로(丹爐)에서 용솟음치듯 솟아나는 생명에너지의 근원지로서, 중단전과 상단전의 발전은 하단전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하단전이 견실해야 중단전과 상단전도 실하게 가꾸어나갈 수 있다. 또한 모든 중심은 하단전에 두고 출발해야하며 적절한 배분에 의해 중단전과 상단전이 골고루 발달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精氣神의 氣는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주체다. 그것은 사고활동과 정신활동을 주관한다. 모든 감각기관을 지배하며 행위의 주체로서 작용한다. 머리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감각기능과 사고력, 창의력, 직관력뿐만이 아니고, 예지력과 투시력 등의 영적인 능력까지도 관장한다. 상단전인 氣는 선명한 의식을 갖고 전체를 통제하며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한 거울의 방이라고도 불리며 투시나 기타 영적인 현상들이 주마등처럼 나타나는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식과 생각을 주관하는 상단전은 우리들 머리속을 채우고 있는 잡념들을 다 떨쳐버리고 정신을 맑고 밝게 하면, 우리 의식은 무심의 자리인 하단전에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된다.

 

세 번째로 마음자리라고 불리는 중단전의 神은 상단전의 氣와 더불어 생명 유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神은 심장을 중심(中丹田)으로 온 몸에 퍼져 있다. 神이 거하는 중단전은 소우주인 인간과 대우주가 소통하는 곳이며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거하는 곳으로 혈기와 의협심이 일어나고 사단(四端)이 발로하는 곳이다. 감정의 응어리가 이곳에서 맺히게 되며, 그렇게 되는 경우 가슴이 답답하게 된다. 그래서 중단전이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속이 비좁고 고집이 강하며 이해심과 아량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들은 氣가 탁한 사람들로서 자연의 리듬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과 욕망의 리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어서 편협한 자신만의 울타리 속에서 살아간다. 중단전은 이렇게 마음을 주관하는 자리로서 우리가 평화스럽고 활짝 열린 마음을 갖게 되면 가슴에 있는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들이 가라앉게 되고 마음의 파장이 내려와 하단전에 머무르게 된다.

 

精은 몸의 근본이며, 중단전인 神은 마음으로 일신의 주(主)가 되며, 상단전인 氣는 사유 활동을 하며 육신을 이끌어 가는 몸의 근체(根蒂)가 된다.(국선도 I, 92 쪽) 그런데 인간의 “삶의 道”(生道)는 精과 神이다. 그리고 형체 즉 몸은 氣에 의탁한다.(국선도 I, 151 쪽) 이 말의 의미는 몸은 精이며, 氣란 한 인간을 이끌어 가는 주인(사고의 주체)의 대행 역할을 맡고 있다는 뜻이며, 여기서 神은 우리의 마음이다. 국선도는 이렇듯 하단전 호흡을 통하여 일차적으로 단전의 힘을 강화시키고, 그 축기된 힘을 바탕으로 기를 운용하여 중단전과 상단전을 실하게 함으로써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수련법이다. 따라서 가슴에 막혀있는 차갑고 딱딱한 응어리를 단전호흡(조신법, 조식법, 조신법)으로 강화된 단열을 가지고 서서히 녹여갈 수 있다.

 

임경택 교수(단침과 열기 : 2004년)에 의하면, 누구나 수련을 깊이 하면, 그 응어리를 볼 수도 있고, 어느 정도 딱딱한지 그 상태까지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경지까지 도달하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국선도 수련은 하면 할수록 건강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건강이 더 악화되거나 퇴보하는 경우는 없다. 수련하는 이들의 건강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오래 수련을 한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 수련을 체계적으로 해 나간다면, 고치지 못할 병은 극히 제한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구든지 단전을 약화시키고 생기를 없애는 여러 요인들을 제거하면서 수련을 한다면, 국선도 단전호흡 수련은 상담이나 정신치료 방법보다 훨씬 더 자신의 건강을 자신의 힘으로 회복하고 효과적인 자기관리를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선도 단전호흡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우리 선조들이 전해 내려준 신토불이의 심신수련법이라는 데 있다. 국선도는 요가나, 스트레칭, 헬스, 에어로빅, 필라테스 등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출처도 모르는 수련법에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체형과 기질에 맞게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는 가장 탁월한 심신 수련법인 것이다.

 

건강유지를 위해 외부로부터 아무런 검증 없이 들어온 이들 건강 수련법들과 5천년을 면면히 지나오면서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수련법으로 정립된 한민족의 고유한 수련법인 국선도와 어찌 비교를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 민족의 정통 수련법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눈, 코, 귀를 감고 국선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국선도가 추구하는 이념과 정신, 더 나아가서 체계적인 수련 방법이 여타의 수련법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국선도를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추구하였던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2005.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