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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펌] 한국 철학은 기일원론이다.


“한국철학은 기일원론이다”
[한국의 철학자들 - 글을 마치며] “철학을 소설처럼 읽자”

국선도의 철학관은 즉관론입니다. 더군다나 기일원록적 세계관이 그 핵심이기도 합니다. 이에, 한국철학의 독자적 발전의 결과인 기일원론에 대한 자세한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source: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9253

정신 몽롱하게 하는 이와 기

"이기론(理氣論)만 나오면 전멸이다!"

학창 시절, 윤리 철학을 공부하다가 이(理)와 기(氣)에 대한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정신을 잃게 되었다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선생님이 시험에 나오니 중요하다고 밑줄 쫙쫙 그으며 얘기해도, 눈꺼풀은 천근만근이 되어 스르르 내려오게 되고, 교실 안의 학생들은 거의 전멸의 수준이 된다. 어찌하여 우리 조상님들께서는 우리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반면에 정신과 물질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정신이 무엇인지, 물질이 무엇인지를 직감적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 내가 보고 있는 책, 그 책이 놓여 있는 책상은 물질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집중하게 되는 것은 정신이다.

100~200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놓으면 상황은 정반대가 될 것이다. 서당에서 회초리를 맞아가며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하늘 천, 따 지..." 하며 외우는 어린 아이에게 이와 기는 자연스런 낱말이었다. 그 아이에게 정신과 물질에 대해 말하면 그 아이는 그 뜻을 생각하느라 끙끙댔을 것이다.

이러한 상반된 상황이 나타나는 이유는 언어의 친숙성 여부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와 기라는 낱말에 익숙한 서당 아이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낱말을 이와 기에 연관시켜 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으니 끙끙댈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정신과 물질이란 낱말에 익숙한 오늘날의 학생들은 이와 기를 정신과 물질이란 낱말로 아무리 해석해보려 해도 되지 않으니, 그저 머리가 띵하고 졸음이 올 뿐이다.

여기에서 철학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서양의 철학과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자랐다. 학교에서는 서양에서 공부했거나 서양에서 공부한 사람들에게 교육받은 선생님들에게 교육을 받는다.

판소리는 명절날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편성되는 것조차 이제는 사라질 정도로 듣기 어렵지만, 팝송이나 대중가요는 사시사철 들으며 살고 있다. 서양의 유명 화가의 그림은 비싼 돈 내고 줄을 서가면서까지 보지만, 한국의 옛 화가들의 그림은 국립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서양의 것, 서양의 철학과 문화에 젖으며 살아 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익숙한 서양 철학의 관점으로 한국 철학을 보려니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조상님들의 말씀이지만 딴 나라 사람들 얘기처럼 느껴진다. 1백여 년 전 개화파가 '문명개화'를 내걸고 서양에서 배우자 하였는데, 그 결과가 오늘날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기의 관계가 중요

이기론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질문이 "기(氣)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기란 물질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그 질문의 핵심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는 기를 물질로 해석한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나온 '공식적인' 중국철학사는 그러한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북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의 철학사를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이란 시각에서 기를 물질로 규정하고 기일원론을 유물론이라 하고 있다.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기와 물질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일원론을 불철저한 유물론이라고 단서를 붙여놓는다.

그런데 기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 철학적으로 볼 때, 기는 이(理)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된다. 조선에서 성리학을 둘러싼 가장 중요한 철학적 논쟁은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 사이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즉 이와 기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서경덕과 이황의 논쟁을 예로 들어보자.

서경덕은 <이기설>에서 "바깥이 없는 것을 태허(太虛)라 하고, 처음이 없는 것을 기(氣)라 하니 허는 바로 기이다"라고 하였다. 대중가요에 나오는 가사처럼 끝도 시작도 없는 것이 기이고, 그 기가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는 얘기이다.

그런 후 "기 밖에 이(理)가 없으니 이란 것은 기의 주재(主宰)이다. 주재란 것은 밖에서 와서 이것을 주재하는 것이 아니요, 그 기의 작용이 그러한 까닭의 정당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을 가리키어 이것을 주재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기 안에 있어서 그 둘은 분리할 수 없고, 또한 이는 기의 운동 원리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이다.

이황은 <비이기위일물변증>에서 서경덕의 주장을 비판하여 이와 기는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고 하였다. "공자와 주자가 음양(=기)은 태극(=이)이 낳은 것이라고 밝게 말하였는데, 만일 이와 기가 본래 하나라고 한다면 태극이 곧 양의(음과 양)이니, 어찌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 할 수 있는가" 이와 기는 별개의 것이고 이가 기를 낳으니 본원적인 것이란 얘기이다.

그는 이는 도(道), 성(性, 본성)이라고 말하며, "기는 있지 않아도 성이 먼저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비록 물(物)은 있지 않으나 이미 물의 이치는 있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가 먼저 존재함을 말하였다.

   
  ▲ 왼쪽부터 이황, 이이, 홍대용

서경덕과 이황의 입장이 너무도 분명하여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서경덕이 이는 기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한 반면에 이황은 이와 기는 엄격히 구분된다고 하고 있다. 기는 현실의 세계이다. 그래서 이는 현실 세계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설명되지 않는다. 이황처럼 공자, 주자 등 성현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 뜻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황은 학문을 하는 올바른 태도를 '경(敬)'이라 하였다. 성현의 말씀을 존중하고 존경하여 받들고 받아들여 따라야 한다는 얘기이다.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은 실종되고 만다. 이이는 이황의 주장이 과도하다 판단하여 현실 세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이와 기를 구분하고 이의 우위성을 주장함으로써 이기이원론의 틀 내에 머물렀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 아니다

현실 세계 내에서는 온갖 대립과 갈등이 생겨난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중요하게 된다.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 역시 그런 문제들을 주장의 핵심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들을 공리공론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태도는 옳지 않다. 동서양을 막론하여 모든 철학은 바로 이 문제에 매달리어 온 것 아닌가.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를 구분하여 이는 선(善)이고 기는 선과 악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본다. 기가 악하더라도 이가 있음으로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서 타고난 본성을 '기질지성'이라 하고 본래의 본성을 '본연지성'이라 하였다. 앞의 것이 기이고 뒤의 것이 이이다. 인간은 기질지성을 넘어서서 본연지성으로 되돌아가야 인간다울 수 있다고 하였다.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혼란이고 악이다. 이런 혼란은 인간이 타고난 '기질'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이 '본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임금도 인간이므로 예외일 수 없다. 그렇게 하여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자신의 위치와 처지에 맞게 도덕적인 삶을 삶으로써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흘러간 레코드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리는가. 오늘날에도 너무나 자주 듣게 되는 얘기이다. 집회와 시위가 일어나면 즉각 사회혼란으로 규정된다. 집회 참여자들을 설득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잘못된 선동에 귀 기울이지 말고 즉각 자신의 생업으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집회가 해산되면 사회혼란이란 악은 제거되고 조화롭고 평화스러운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집회가 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빨리 집회가 해산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기일원론은 이와 기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는 기의 원리일 따름이고, 존재하는 것은 일체 기일뿐이다. 인간이 타고난 기질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본연이란 없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떠난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대용은 도덕을 사람만이 가진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하였다. 동물도 나름대로의 도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고 보았다. 박지원은 동물이 자신의 삶을 누릴 뿐이지 사람처럼 다른 생명체를 해치지 않으니 오히려 사람보다 선하다고까지 하였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다. 따라서 삶을 해치는 것이 악이다. 삶을 해치는 일은 동물보다 사람이 더 많이 한다. 사람 중에서는 가진 자들이 더 많이 한다. 이것이 현실 세계의 모습이 아닌가.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일어난다면 어느 쪽을 더 꾸짖어야 하는지 자명한 일이다. 상대적 관점에서 현실을 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미생물이든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기일원론의 입장인 것이다.

이쯤 되면 이기이원론과 기일원론의 대립이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를 구분하고 이를 우월한 것으로 보는 차별적 세계관이다. 기일원론은 이런 구분을 부정하는 평등의 세계관이다. 이기이원론이 현실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 근본 이치인 이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기일원론은 기가 운동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근본 이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관념론과 유물론의 논쟁처럼 관념이 먼저냐 물질이 먼저냐를 다투는 논쟁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을 넘어설 수 없다. 이기이원론이 이라는 우월적인 것을 설정하듯이, 관념론이든 유물론이든 우월적인 것을 설정한다. 그것과 반대쪽에 있는 것은 약하게 말하면 부차적인 것이고, 세게 말하면 악한 것이 된다.

기일원론은 정신과 물질이 모두 기라고 말한다.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구분은 의미가 없다. 기는 물질이면서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기를 물질이라 생각하게 되면 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원론을 넘어서고자 했던 기일원론 자체를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기일원론이 한국의 철학이다

기일원론의 핵심은 우주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원리를 밝히려는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기가 모여서 생겨나고 기가 흩어지면 사라진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기 스스로의 운동이다. 최한기는 이런 우주 만물의 원리를 가리켜 유행지리(流行之理)라고 하였다.

그러면 기가 어떻게 스스로 운동을 하는가. 서경덕은 수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숫자를 들어 설명한다. <원이기>에서 "이미 일기(一氣)라 했으니 1은 절로 2를 포함하고, 이미 태일(太一)이라 했으니 1은 바로 2를 포함한다. 1은 2를 생(生)하지 않을 수 없고, 2는 저절로 생하고 극(克)한다"라고 하였다.

하나인 기는 음기와 양기라는 두 개의 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1은 2를 생하지 않을 수 없다. 음기와 양기의 운동에 의해 사물이 생겨나는 것이니, 2는 저절로 생한다. 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음기와 양기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니, 2는 저절로 극한다. 따라서 "2는 저절로 생하고 극한다."

사물이 생겨난다는 것은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생은 극이고 극은 생이다. 서경덕은 이를 두고 "생하면 극하고 극하면 생한다"고 말한다.

조화와 갈등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조화에서 갈등이 생겨나고 갈등을 극복하여 조화가 이루어진다. 조화와 갈등은 현실세계의 자연스런 모습일 뿐이다.

우리가 자주 듣고 있는 '상생'이란 말을 예로 들어보자. 상생과 대비되는 말은 상극이다. 상생은 조화를 말하고 상극은 갈등을 말한다. 상생과 상극은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들이다. 상생이 상극이 되고, 또 상극이 상생이 된다.

그런데 상생은 좋은 것이라 칭송되고 상극은 나쁜 것이라고 배척된다. 이기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상생은 이(理)이어서 선이지만, 상극은 기(氣)인데 악한 것임으로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이원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백여 년 전 성리학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지만, 이기이원론에 입각한 사고는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의 철학을 폐기하고 서양철학을 들여와 근대 사상을 이루고자 했던 시도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기일원론은 한국의 철학이다. 그것 역시 중국에서 들여온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중국에서도 기일원론이 존재하였다. 북송 시대의 철학자인 장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서경덕은 장재에 대해 "꼬투리만 내고 발명(發明)하지 않았다"며 불철저함을 비판하였다.

장재 이후 명나라가 멸망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왕부지가 나와 기일원론이 부활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기일원론은 중국 철학에서 사라졌다.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기는 물질이란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서양철학을 기로 포괄하려 하지 않고, 물질 개념을 도입하여 기를 폐기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일원론은 '수입품'이 아니라 독자적인 발전을 해온 것이다. 고려 시대 이규보가 '물자생자화(物自生自化)', 즉 물은 스스로 생겨나 스스로 변화한다는 원리를 제시하여 기일원론의 길을 열었다. 이후 물을 기(器)라고 하다가,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용어를 빌려와 기(氣)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 김시습은 귀신에 대해 말하면서 "기가 모여 사람이 되고, 사람이 죽으면 다시 기로 흩어진다"고 하여 기의 운동을 제시하였다. 서경덕은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기이고, 이란 기 안에 있는 원리에 불과하다고 하여 이와 기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임성주, 홍대용, 박지원이 등장하여 인간과 동물의 본성에 대해 논하면서, 순수한 선(善)은 인간에게만, 그것도 성인에게만 있다는 이기이원론의 인성론을 뒤집었다. 선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다고 하여 상대적 관점을 확립하고,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라고 하였다.

최한기는 그 이전의 기일원론을 종합하고, 그것에 입각한 자신의 학문을 기학(氣學)이라 정의하였다. 그는 서양의 철학과 과학의 내용을 기 개념으로 수용하면서, 확고한 인식론의 체계를 세웠다. 그것은 현재 밝혀진 것을 바탕으로 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기일원론을 발전시켜 근대사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한국의 철학자들> 연재를 시작하면서 제기했던 의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때이다. 한국철학은 존재하는가. 물론 존재한다. 기일원론이 한국의 철학이다. 문명개화를 하자며 전통과 단절을 시도했을 때, 단절된 것은 기일원론뿐이었다. 이기이원론은 특히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오늘날에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 전통을 단절하고 서양 사상을 배우자고 했던 주장이 받아든 성적표는 오늘날 너무나 초라할 뿐이다.

지금까지 본 연재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동안 많은 분들께서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 중에서 철학과 연관된 부분만 모아 필자의 생각을 밝히는 글을 마무리 글로 하였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은 기회가 되면 보완을 할 예정이다.

글을 쓰는 과정은 또한 공부를 하는 과정이다. 본 연재를 하면서 또 한 번 한국의 철학에 대해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지금까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오류가 참 많았기에 부끄러운 마음이다.

어디선가 철학을 문학처럼 하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누구나 소설은 쉽게 읽는다. 그러나 철학책만 잡으면 한 쪽도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철학책도 소설처럼 읽어버리자. 읽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있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쓴 글을 사람이 못 읽겠는가? 그렇게 하여 철학, 특히 한국철학을 조금 더 가깝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