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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선도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2005.09.15 21:42


 

▶사진: 청산선사님 강연하는 모습

 

국선도에서는 理入이 아니라 行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도주에 보면, 正覺道源 이후에 體知體能 이 나오지요, 즉 다시말해 먼저 바른 법을 옳게 깨닳은 연후에 몸으로 닦아 익혀 올바른 깨달음을 얻어가지라는 말입니다.

 

일각에서는, 너무 行入만을 강조하여, 참된 국선도의 이치를 깨달아 가고자 하는 理入에 대하여 공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도 합니다만,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두가지 모두 병행해서 이치를 깨닳는 제대로된 노력도 기울이고, 그 바른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몸으로 能하게 하는 두가지 수련법이 모두 필요할 듯 합니다.

 

이에 理入과 行入의 근거인 달마대사의 글을 전합니다.

혹여 참조가 되셨으면 합니다.

 

국선도 수사, 최정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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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達磨大師)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이입(二入) 법문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나 또는 달마(菩提達磨 Bodhi Dharma?∼528) 대사의 소실육문(少室六門)에 있는 법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한 바와 같이 관심론(觀心論) 법문은 굉장히 소중한 법문으로 종전에는 달마 스님이 지었다고 한 것인데, 근래에 와서는 신수 대사가 지었다는 연구도 나와 있으니 우리로서는 진실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마는

 

아무튼 이 리입(理入), 행입(行入)만은 달마 스님쩨서 역설한 소중한 법문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 이입 (理入) 二入…理入과 行入을 말함 (金剛三味經上, 達磨의 少室六門) 理入…敎를 빌어(籍) 宗을 悟하면 -切衆生 同一眞性임을 信할 수 있으나 客塵妄想에 가리어 나타나지 못한다. 만약 妄을 捨하고 眞에 歸하면 聖凡이 等-하여 寂然無爲함을 理入이라한다.

 

이입(二入)이란 리입(理入)과 행입(行入)을 말합니다.

 

리입(理入)이란 이치로 해서 먼저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하고 행입(行入)은 행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달마 스님이나 또는 어떠한 도인들이나 먼저 이론적인 이른바 해오(解悟)를 먼저 앞세웠습니다. 먼저 이치를 앞세웠다는 말입니다. 이치를 먼저 알아야 바른 행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Einstein,Albert 1879∼1955)도 자기 제자인 하이젠베르크(Heisenberg,Wemer Karl 1901∼)에게 '먼저 이론이 있어야 참다운 실험을 할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사실 어떤 기술이라든가 실험도 역시 정확하고 정밀한 이론이 확립되어야 참다운 실험이 됩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도리도 이론적인 것이 먼저 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치를 잘 모르면 우리가 닦는다 하더라도 많은 힘을 낭비하게 됩니다.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이 자기 행법(行法)이 자기 품성과 안 맞는 길을 그냥 어거지로 정진할 때는, 그것이 안 하는 것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지마는, 자칫 몸도 무리가 오는 것이고 공부가 굉장히 더디어서 자기 스스로 생명의 낭비를 하는 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정확히 바른 체계를 세워 가지고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리입(理入)은 '교(敎)를 빌어서 종(宗)을 즉 종지(宗旨)를 깨달으면 일체중생과 우주만유가 바로 동일한 불성(佛性)임을 통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객진(客塵)인 번뇌 망상에 가리어 나타나지 못합니다. 만약 망상을 버리고서 진(眞)에 돌아가면, 성범(聖凡)이 등일(等一)하여, 평등일여(平等一如)하여 적연무위(寂然無爲)함을 신해(信解)함을 리입(理入)이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아무튼, 우리 불교 술어는 모두가 다 허투로 아무렇게나 붙인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합리적인 것입니다. 객진(客塵)이란 어째서 번뇌를 하필이면 손객(客)자 객진이라 했는가? 이른바 번뇌의 별명이 진(塵)인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번뇌에 때묻은 세계라고 해서 진계(塵界)라고 하는데 이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객진이라 하는 것입니다. 본래 법성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중생이 잘못 보아서 허환상(虛幻相)을 내는 것이지 번뇌가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일미평등한 청정무구한 진여불성의 청정법계인데 우리 중생이 범부의 소견으로 분별할 때 티끌 같은 환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분명히 느끼고 마땅히 이런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설사, 남을 꾸중하더라도 진심(瞋心)이 치성하지가 않고 남에게 베풀 때도 역시 상을 안 내는 무주상(無住相)보시가 될 수가 있겠지요. 물론 범부야 아직 법성과 하나가 못되었으니까 온전히 무주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선 리입(理入)으로, 하나의 도리로 귀일(歸一)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치는 쉬워도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기도나 참선을 해서 마음이 어느 정도 정화되지 않으면 확신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문(無門慧開 1229 無門關著)선사가 무문관(無門關)에서 말씀이, 공부 정진할 때 '구구순숙(久久純熟)이면' 오랫동안 순수히 닦을 때는 '자연내외 타성일편(自然內外打成一片)이라'고 했습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애쓰고 지속적으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닦아 나갈 때는, 자연히 우리 마음 속에나 밖에나 모두가 다 하나로 통일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된 때라야 비로소 '모두가 다 비었구나, 모두 하나구나' 하고 진정으로 확신이 서는 것인데 그러기 전에는 이치로는 '그렇겠거니' 하지만 '정말 그렇구나!' 하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우리가 참선이나 기도나 공부로 해서 하나의 자리를 '진정 그렇구나' 할 수 있는 정도로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론적인 것이 확립이 되면 다음은 행입(行入)입니다.

 

2. 행입(行入) 理에 依하여 行을 일으키고 行에 依하여 理에 들어감을 行入이라 함. 行入에 四行이 있다. (1)報寃行…무릇 修道人이 만약 寃苦를 受할 때는 마땅히 念할지니 내가 無始以來로 本을 捨하고 末을 좇아 諸有에 流浪하며 많은 寃憎을 일으켜 그룻됨이 限이 없었다. 지금 그릇됨이 없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過去惡業의 業報이다. 甘心忍受하여 寃訴하지 않는다. 此心이 生할 때 理와 相應하며 바로 寃을 體하여 道에 나아감으로 報寃行이라 한다. (2) 隨緣行…만약 勝報榮譽를 받더라도 모두가 다 過去宿因의 所感이다. 緣이 다하면 다시 사라진다. 어찌 기뻐할 일이라 하겠는가. 得失의 因緣을 따라 마음이 增滅이 無하면 八風이 動하지 않고 저절로 道에 順한다. (3) 無所求行…智者는 眞理를 悟하고 安心無爲 萬有皆空하니 希求할 것이 없으며 無所求는 眞正한 道行에 順한다. (4) 稱法行…自性淸淨의 理를 法이라 하는데 法體에는 간(心+堅)貪이 없다. 이에 順하여 檀을 行한다. 이와 같이 法에 따라 六度(六波羅蜜)를 行함을 稱法行이라 한다.

 

 

1) 보원행 (報寃行)

 

행입(行入)은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리(理)로 들어가 네 가지 행을 하기에 리입사행(理入四行)이라고도 합니다. 행입이라 하는 것은 리(理)에 의하여 행을 일으키고 행에 의하여 리에 들어감으로 행입이라 하는 것입니다. 행입에는 사행(四行)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원행(報寃行)으로서 무릇 수도인이 여러 가지로 고통이 많이 있는 것인데 그런 고통 가운데도 원망하는 고통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만약 원망하는 고통 곧 원고(寃苦)를 받을 때는 마땅히 생각할 것이 '내가 무시(無始) 이래로 근본을 버리고서 현상만 좇아 제유(諸有)에 유랑하여 많은 원증(寃憎)을 일으켜 그릇됨이 한이 없었다 '고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근본을 버린다는 것은 진여불성자리, 본체를 여읜다는 의미 입니다. 우리는 근본을 버리고 허망한 현상만을 좇는 속물이 되어서 중생계인 삼계육도에 떠돌면서 많은 원망과 미움을 일으킨 것이 한이 없습니다. 남한테 원망도 많이 하고 또는 원망도 많이 받으며 원증을 일으켜 그릇됨은 한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만약 과거에 업장이 없고 좋은 일만 많이 했다면은 인간으로 태어날 필요가 없이 저 천상에나 극락으로 가서 영생의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마는, 조금은 좋은 일도 했겠지마는 배신도 많이 하고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금생에 인간으로 온 것이므로 과거의 악업이란 한도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고생받는 사람들이 흔히 호소하는 것을 보면 자기는 그래도 무던히 양심적으로 사는데 고통만 중첩되고 곤란스럽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한테 별로 못된 일도 않고 사는데 항시 애꿎은 액운(厄運)만 계속 된다는 말을 하는 분들은 역시 인과(因果)를 모르는 소치입니다. 지금 그릇됨이 없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과거 악업의 업보(業報)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심인수(甘心忍受)하여야 합니다. 그저 어떤 것이나 달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금생에는 애매한 것이라 하더라도, 누가 칼을 가지고 자기 목을 찌른다 하더라도, 다 과거세에 지은 것이므로 의연하게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받아서 원망스럽게 호소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심인수하여 원망스럽게 호소하지 않는 마음이 생길 때 체념이 되고 평등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생길 때 리(理)와 상응(相應)하며, 바로 원(寃)을 공(空)으로 통찰할 때 도(道)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세에 원망스런 일도 하고 받기도 하고 금생에도 남한테 원망도 받고 또는 남을 원망하는 그런 것을 모두 제법공(空)의 본체로 돌려 도(道)에 나아감으로 보원행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에 고생을 통해서 고생을 극복함으로 해서 공부가 나아가 질 것인데 고생이 없는 사람들은 사실은 공부가 잘 안 된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어떠한 고생도 반드시 본체로 돌려 생각할 때는 충분히 전화위복을 시켜서 공부에 조도(助道)가 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남한테 배신을 당하거나 자기 걸망까지 몽땅 잃어버리거나 모두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과거 전생에 내가 지은 것을 받는구나'하는 자기 반성으로 말미암아 본체로 돌아가는 공부에 한껏 박차를 가할 수가 있습니다.

 

 

2) 수연행 (隨緣行) 그 다음은 수연행(隨緣行)인데, 만약 우리가 과거세에 무던히 좋은 일을 하고 금생에 좋은 과보(果報)인 승보(勝報)를 받거나 영예스러운 것을 받더라도 모두가 다 과거 숙세에 지은바 인(因)이 금생의 과보가 되는 것입니다.

 

명예롭고 지위가 높고 남들이 칭찬하더라도 인연이 있어서 지금 받지만 인연이 다하면 다시 사라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많은 보시를 받든지 남이 칭찬을 하든지 간에 기뻐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얻고 잃어버리는 득실(得失)의 인연을 따라 마음에 증감(增減)이 없으면은 팔풍(八風)이 동(動)하지 않는 것입니다.

 

팔풍(八風)이란 이·쇠·훼·예·칭·기·고·락(利衰毁譽稱譏苦樂)입니다. 우리가 이롭고, 쇠하고, 칭찬을 받고 또는 우리를 비방하고, 괴로움을 느끼고, 안락하고, 이것을 팔풍이라 합니다. 기쁠 때는 기쁘다고 마음이 들뜨고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침울하고, 남한테 비방 받으면 마음이 불룩거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팔풍이라 합니다. 이런 계기에 마음이 동하지 않아야 공부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얻는다고 더 기뻐하고 또는 잃는다고 하여 괴로워하는 등 득실에 따라 마음에 증감이 없을 때는 팔풍이 동하지 않고 저절로 도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연행입니다.

 

 

3) 무소구행 (無所求行) 다음에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인데, 구함이 없는 행이라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진리를 깨닫고 안심무위(安心無爲)하고 만유개공(萬有皆空)의 도리에 안주(安住)하니, 마음이 조금도 다른 것에 대해서 속상할 필요가 없이 항시 안온하여 마음으로 동요가 없고 만유가 다 비어 있으니 희구(希求)할 것이 없으며, 바랄 것도 없고 다시 구할 것이 없는 이것이 즉 진정한 도행(道行)에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매 가운데도 무원삼매(無願三昧)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삼매입니다. 내가 건강해야겠다, 오래 살아야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하게 해야겠다든가 또는 공부를 빨리 잘 해야겠다든가 그런 것은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게으름 부리면서 바라지 않으면 큰 탈이겠습니다마는, 최선을 다하면서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원삼매입니다. 따라서 무원삼매나 무소구행은 같은 의미가 됩니다.

 

 

4) 칭법행 (稱法行) 다음은 칭법행(稱法行)에 대하여 자성청정(自性淸淨)의 리(理)를 법이라 하는데, 법은 두 가지로 쓰입니다. 본질적인 우주의 진리를 바로 법이라고 하고, 또는 만법(萬法)이라 할 때의 현상적인 제법(諸法)을 법이라고 합니다.

 

자성청정의 리를 법이라 하는 법체에는 간탐이 없습니다. 자성청정한 .진여에는 탐하고 아끼고 인색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다 주어도 조금도 아낌이 없기 때문에 살타 왕자가 새끼를 낳고서 굶주리는 범에게 자기 몸을 바친 것이 아닙니까? 법의 도리에 따라서 단(檀Dana)을 곧, 무주상(無住相)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에 따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행함을 칭법행이라 합니다. 칭(稱)은 일컬을 칭자라고도 하지만 '무엇 무엇에 들어맞는다' 할 적에 칭자를 씁니다. 따라서 법에 들어맞는 행이란 뜻입니다.

 

 

이 이입사행은 달마 대사께서도 역설을 하고 또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에도 나옵니다.금강삼매는 삼매 가운데서 가장 차원 높은 삼매가 금강삼매 입니다. 수릉엄삼매, 금강삼매, 반야바라밀, 사자후삼매, 또는 불성(佛性) 모두가 다 같은 뜻입니다. 이른바 진여불성을 조금도 흠축(欠縮)없이 그대로 계합(契合)하는 경계가 바로 금강삼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이 리입사행(理入四行)을 명심해서 어떤 경우에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떻게 불행한 시련을 겪는다 하더라도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설사 내가 당장 죽는다 할지라도 나한테는 아무런 손해가 없고 내 생명은 영생하고 나는 본래 만덕을 갖추고 있다' 고 이론적으로 달관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느 수행자가 친한 도반과 둘이 공부하다가 부처님을 친견하려고 같이 먼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이 멀어 오랜 시일이 걸리고, 목이 타는데 마침 길가에 있는 웅덩이 샘물을 만났으나 가뭄 때라 물은 거의 밭아 가고 그나마 물 안에는 피라미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두 비구는 목이 말라서 그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곧 죽을 지경이라서 고민을 했습니다. 이 물을 마시고 여기서 안 죽어야 부처님한테 가서 법문을 듣고 생사를 해탈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 피라미도 역시 하나의 생명인데 그 물을 마셔버리면 피라미를 죽이는 것이 되지 않는가? 물을 마시고 피라미들을 죽일 수도 없는 것이고 또 안 먹고서 죽어버리면 부처님한테 가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 뻔한데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둘 가운데 한 사람은 안 먹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못 가다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한 비구는 그 물을 마시고서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부처님 회상에 나아가서 부처님의 위없는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환희 용약하면서도 불현듯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울먹이며 "세존이시여, 사실은 저는 이와 같이 세존의 무상법문을 듣고 환희 용약합니다마는, 저의 도반은 같이 오다가 하찮한 피라미들을 살리기 위해서 물을 마시지 않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제 저 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게 되오니 죄책감과 비감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하고 호소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여, 그대는 안 보이는가? 그대 하고 같이 오다가 쓰러져 죽은 그 수행자는 즉시에 도리천에 태어나서 지금 내 뒤에서 법문을 듣고 있노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설화는 단순한 비유담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허환상인 이 몸뚱이만 인연따라 나고 죽고 하는 것이지 본래 죽음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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